▲<고산자, 대동여지도>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지도꾼' 김정호에 대한 그간의 일반 상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험난한 여정 끝에 지도를 만들었다는 인식에 기초를 두고, 영화 초반부는 그가 돌아다녔을 전국 주요 명소들을 쭉 보여준다. 참고로, 고산자(古山子)는 그의 호다.
김정호(1804?~1866년)는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19세기 전반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대 최고의 '지도꾼'이었다. 한반도를 지도 위에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도를 통해 대중에게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한국 지도의 발달사라는 관점에서, 그는 분명 위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정호가 업적을 이룬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눈비를 맞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는 현재로서는 근거가 희박하다. 그래서 영화 <고산자>가 기반을 두고 있는 그 같은 설정은 지금으로서는 실제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옛날 지도는 기본적으로 통치의 목적에서 나왔다. 백성을 다스리고 조세를 징수하며 외적을 방어해야 하는 왕실로서는 당연히 지도를 갖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제작되었다.
일례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고구려 편)에는 서기 628년 고구려 영류태왕이 고구려 지도를 당나라에 제공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이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전국적인 지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1953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발굴된 고구려 무덤의 벽면에서는 만주에 있는 요동성을 그린 지도가 발견되었다. 이 지도에는 성벽과 강과 산은 물론이고 거리와 건물까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도에 대한 국가의 욕구가 꽤 구체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전쟁이 빈발했기 때문에, 옛날 국가는 지금 못지않게 지도의 중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그 같은 자신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지방에 있는 통치조직을 활용해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중앙에 있는 관료나 병사들에게 말을 내주고 이들을 언제라도 변경에 보내 지도를 그리도록 할 수 있었다.
지도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낄 뿐 아니라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조건도 가장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국가만큼 지도를 잘 만들 수 있는 주체는 없었다. 국가가 최고의 인적·물적 기반과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따라서 영화 <고산자> 속의 김정호처럼 홀로 외롭게 전국을 여행하는 사람보다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조직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자세한 지도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김정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생산한 기존 자료를 십분 활용했다. 기존의 지도를 참조하고 보완 내지는 수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도를 그려낸 것이다.
기존의 지도만 갖고는 더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없다. 구체적인 지리 지식을 담은 지리지의 도움도 빌려야 한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의 도움까지 빌려 <청구도>와 <동여도>란 지도를 만들고 나아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지도를 만든 일차적 방식이었다. 무릎 관절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전국팔도를 일일이 누비는 영화 속의 김정호와는 분명 달랐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홈페이지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김정호가 기존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에도 많이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동여도지>나 <여비도지> 같은 지리지를 집필한 데서도 추론할 수 있다. 지리지를 많이 읽어보고 참고하다 보니 기존 지리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 보니 기존과 다른 새로운 지리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여행에 주로 의존하여 지도를 제작했다면, 지리지를 만드는 데 그렇게 공을 쏟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증언
이런 사실은 김정호와 친밀했던, 혹은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친구인 실학자 최한기(1803~1877)는 김정호의 지도 <청구도>에 실린 서문에서 "친구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은 뜻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장단점을 살폈다"고 말했다. 김정호가 기존 지도 및 지리지를 고증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리 지식을 발전시켰다고 말한 것이다.
유재건(1793~1880)이란 사람도 증언을 거들었다. 왕립 학술기관인 규장각에서 문서를 다루는 서리로 근무했으며 7000수 이상의 시를 남긴 문학인이다. 성공한 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향견문록>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바로 이 <이향견문록>에 그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도학에 취미가 있어서 이것들을 고증하고 널리 수집하여…. (중략)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 유재건 <이향견문록> 중에서
김정호의 주된 방식이 지리지 고증이었다는 점은 김정호의 후원자인 신헌(1810~1884)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신헌은 영화 <고산자>에도 등장했다. 영화에서 흥선대원군을 보필하는 핵심 측근이 있었다. 배우 공형진이 연기한 그 인물이 바로 신헌이다.
최종적으로 정1품 작위를 받은 신헌은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할 당시의 조선측 대표였다. 그가 청·장년기에 역임한 관직 중에 한양을 방어하는 금위영대장과 임금을 보좌하는 좌승지가 있다. 국가 기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관직을 역임했던 것이다.
이런 관직 경력은 신헌이 김정호를 위해 국가 지리에 관한 고급 정보를 빼낼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정보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신헌의 글을 담은 <신대장군집>의 일부인 '금당초고'에 김정호와 관련된 아래의 글이 있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과, 오래된 집에서 좀먹은 채 보존된 책들을 널리 수집하여 고증하고 여러 판본들을 참고했으며, 많은 책들에 근거하여 수집해서 편집했다…. (중략) 그에게 위촉하여 완성했다." - 신헌, <신대장군집> '금당초고' 중에서
이에 따르면, 신헌은 규장각은 물론 국가안전보장회의인 비변사에서 빼낸 지도 자료를 고증해서 나름대로 편집한 뒤 이것을 김정호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김정호는 그것을 기초로 지도를 제작했다. 최한기·유재건에 이어 신헌 역시 김정호의 지도 제작 방식이 주로 지리지 고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옛날 지식인들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요즘 책들에서도 그런 인식이 나오고 있다. 소설 형식을 가미해서 김정호의 일대기를 풀어낸 이기봉의 <평민 김정호의 꿈>에서도 최한기·유재건·신헌과 동일한 관점이 나타난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고지도 및 지리지를 연구한 이기봉은 김정호가 최한기·신헌 등의 자료 제공에 힘입어 지도를 그렸다는 관점에서 그의 일생과 활동을 정리했다.
당시와 지금의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김정호는 발로 뛰어다니며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를 고증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교통·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일개인이 전국을 누비면서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김정호의 방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김정호 입장에서도 발로 뛰면서 자료를 수집하기보다는 규장각이나 비변사에 소장된 일급 자료를 활용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정확했을 것이다. 국가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수집한 지리 정보의 수준을, 한 개인이 발로 뛰어다니며 능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다가 김정호에게는 여기저기를 마음껏 여행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직업적인 지도 조각가였기 때문이다.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조각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직업적인 조각가였다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김정호는 상업적 마인드를 갖고 지도를 조각해서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영화 <고산자>에서처럼 가정과 생계를 내팽개치고 전국을 누빈다는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발품을 최대한 적게 팔면서도 더 좋은 지도를 만들어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위인이었다
▲대동여지도의 축소판인 대동여지전도.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정호가 오로지 지도와 책만 뒤졌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지금의 한반도와 별로 다르지 않는 우수한 한반도 지도를 만들어낸 것을 보면, 그가 어는 정도는 발로 뛰는 현장조사를 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적 추론에 불과하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실제 여행이 아니라 책속 여행을 통해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국학 권위자 중 하나인 개리 레드야드(전 뉴욕 컬럼비아대학 교수)가 <세계 지도학 통사> 전 8권의 일부로 <한국 지도학>을 집필한 일이 있다. 이 책은 옮긴이 장상훈에 의해 한국어로는 <한국 고지도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이 책에서 레드야드는 김정호의 지도 제작 방식에 대해 추정 섞인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김정호는 연구와 여행을 계속하면서 거리 정보를 가다듬었고, 전국을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다시 그렸다."
레드야드는 김정호가 '연구와 여행'이란 방법으로 지도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연구'를 통해 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앞서 소개한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그가 '여행'을 통해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는 경우가 다르다. 이에 관해서는 증거가 없다. 그래서 '연구와 여행' 앞에 '분명히'란 말을 넣은 것이다. 여행이란 방법을 병용하지 않고는 이런 지도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분명히'란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김정호는 기자로 치면 오로지 발로만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기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검색하는 기자였다. 그러다가 가끔은 현장으로 뛰어나갈 때도 있는 기자였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조선 최고의 지도를 만들어냈다. 그가 오로지 발로 뛰어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업적이 대중의 입과 입을 거쳐 전파되는 과정에서 생산된 일종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우선 김정호의 신분에 대해 알아볼게. 영화 예고편을 보면 천한 지도꾼이라는 표현을 썼더라고. 지도 만드는 일을 천하다고 하는건지, 아니면 김정호 본인의 신분이 낮은 인물이라 보는건지 확실히는 모르겠어. 다만, 분명한것은 실제 역사에서 김정호의 신분은 딱히 낮은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야.
일단 현재 알려진 김정호의 신분은 몰락한 양반(잔반이라고 하지) 또는 중인 출신이야. 어쨌든 딱히 부를 누리는 신분은 아니었다는거야. 대신, 당대에 유명한 사람들과 친분이 아주 두터웠어.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와의 교류가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실학자인 혜강 최한기와는 그야말로 절친이었어. 김정호는 최한기가 만든 세계지도인 지구전도, 지구후도 (아래 사진) 의 목판인쇄를 담당했고 최한기는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지구전,후도 아래 사진)의 서문을 작성해줬어.
이게 지구후도, 지구전도이고
이게 청구도야.
지구전도와 청구도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시 설명해줄게.
어쨌든 지금까지 보면 권력과는 거리가 먼 실학자들 하고만 친하게 지낸듯 하잖아. 사실 그렇지는 않았어.
이 근엄해보이는 관리는 신헌이라고 하는 사람이야. 바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야.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고 이후에는 병조판서에 판중추부사까지 하고 나중에 강화도조약때 조선대표로 협상에 나선 대신이야. 참고로 무과 출신인데 추사 김정희의 제자야. 아까 김정호가 김정희랑 친했다고 그랬잖아. 이 부분은 내가 하는 추측인데 어쩌면 스승 김정희에 의해 김정호와 연이 닿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물론 내 추측이지만.
암튼, 김정호의 신분과 인맥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쓰도록 할게. 더 쓰다가는 내용에 끝이 없겠다.
이번에는 대원군 얘기를 좀 해야될 것 같아. 알다시피 철종 사후 조선 왕실에서는 그 다음 왕이 누가 될 것인지 고민에 빠져있었어. 특히 안동 김씨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어. 철종은 5남 6녀를 낳았지만 나중에 박영효와 혼인하는 영혜옹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때 병으로 죽었고 철종마저 30대 초반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직계 왕통이 끊겨서 철종을 데려온건데 철종이 죽으면서 또 직계 왕통이 끊긴거야.
흥선군 이하응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있었어. 그리고 마침 재집권을 노리고 있던 조대비를 찾아갔고 정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기 아들 명복이(철종이랑 18촌 차이야. 이정도면 거의 남남이지.) 를 익종(효명세자, 요즘 하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맡은 역할이야.)의 양자로 들이기로 쇼부를 보고 곧 철종 다음의 왕으로 즉위해. 바로 고종이야. 참고로 이때 안동김씨도 딱히 고종 즉위에 반대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대원군이 소싯적에 안동김씨 밑에서 수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 집권 이후에도 일부나마 권력을 유지해.
고종 즉위 이후 집권한 대원군이 실시한 내정 개혁에 대해서는 잘 알거라고 생각해. 서원을 정리하고, 환곡제를 폐지하고, 치안도 정비할 뿐만 아니라 군사까지도 키웠어. 만주에서 말을 수입한다거나 일본에서 서양식 화포를 수입한다거나 훈련도감의 정원을 늘리는 식으로 말이야. 또 여담인데 야사이긴 하지만 서양의 증기선을 본따서 조선의 기술력으로(물론 위 사진의 해국도지라고 하는 중국에서 만든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책을 많이 참고하긴 했어.) 숯으로 움직이는 화륜선이라는걸 만들었는데 이게 한 3m쯤 가다가 멈췄다고 해.
아무튼 이런 내정개혁을 하면서 대원군은 또 한가지 일을 벌이기로 했어. 바로 흩어져있는 지도를 하나로 합치는 일이야. 사실 지도를 만드는 일은 어느 왕이나 다 중시했던 사업이야. 대표적으로 영조와 그 뒤를 이은 정조가 집권하고서 한 일이 각 군현에 명령해서 그 지방의 지도를 만들도록 하고서 그 지도들을 규장각에 보관했어.
위에 있는 해동지도(영조때 만든 지도로 추정 돼)가 대표적인데 이런 지도들은 초행길을 떠나야 하는 암행어사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고 그 지방의 행정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도 있었어. 그리고 인접한 청과 일본도 지도에 담은 해동지도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국가의 정세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일반적인 대동여지도 비하인트 스토리의 오해처럼 권력층이 외세를 두려워해서 굳이 정교한 지도를 불태울 필요가 없었던거야. 오히려 중시했지.
대원군이 집권한 당시 조선에는 비변사에서 보관중인 지도와 규장각에서 보관중인 지도가 서로 나뉘어져 있었어. 이 지도들을 하나의 지도로 만들 필요가 있었어. 그리고 마침 당시 조선에는 이 일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 있었지. 바로 김정호야.
물론 대원군이 김정호에게 직접 일을 맡긴건 아니야. 대원군은 신헌에게 일을 맡겼어. 그리고 신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적격인 김정호에게 일을 부탁한 것이야. 이미 이때 김정호는 지도제작으로 조선팔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어. 일단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집한 책인 동여편고를 쓰고 청구도, 동여비지, 여도비지도 편찬했어. 그리고 앞에 얘기한 것처럼 최한기의 지구전,후도의 목판을 만든 사람이 바로 김정호야. 특히 위에 사진으로 있는 청구도는 당시 조선으로 유입된 서양식 지도제작법이 가미된 지도였어. 이렇게 지도 관련해서 일 열심히 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신헌이 이를 놓칠리가 없지.
이렇게 해서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지게 된거야. 정부의 주요관료인 신헌이 아무리 이름난 지도제작자라고 해도 함부로 볼 수 없는 비변사와 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빌려주고 김정호는 비변사와 규장각에 있는 수많은 지도들을 일일히 대조해가며 겹치는 부분만 지도에 남기고 만약에 어느 지도도 믿을 수 없을만큼 심하게 변조된 경우, 그리고 심하게 상충되는 경우에만 실측하면서 빈 공간을 채워나갔어.
그러니까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드는데 전국 팔도를 몇 번을 돌고 백두산을 일곱번인가 여덟번인가 올라갔다는 얘기는 구라야. 대신 아예 집 안에서만 틀어박혀서 편집한건 아니고. 본인이 감당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실측이 필요한 부분만 실측한 것이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마침내 대동여지도가 완성되었어.
그럼, 이쯤에서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 왜 사람들은 김정호가 발품을 팔아가면서 대동여지도를 완성했고 대원군이 이를 불태우고 김정호를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해. 일제가 만든 설화거든.
이 사람 아는 사람은 다 알거야. 육당 최남선이라고 고등학교 문학시간때 이름 많이 들어봤을거야. 이 사람이 우리나라 문학에 역사를 남기긴 했지만 동시에 악질 친일파, 일제의 어용지식인이기도 했어.
김정호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는 사실 최남선이 1925년에 동아일보에 남긴 칼럼에서 비롯되었어. 여기에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려고 백두산을 왔다 갔다 했다더라, 근데 그렇게 만든 지도를 몰라주고 정작 김정호는 감옥에서 죽었다더라. 하는 얘기를 쓴거야.
여기에서 끝난게 아니야.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고 조선어독본 편찬에 참여하여 대동여지도 썰을 남겨. 그 내용을 요약하면 김정호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고생하면서 만든 지도를 나라에 바쳤지만 그 가치를 모르고 도리어 엄한 곳에 쓰일까 두려워한 대원군과 조선 조정이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두고 지도는 압수했으며, 그 통한을 이기지 못한 김정호 부녀는 옥사했으나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일본인들은 대동여지도를 러일전쟁에서도,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는 내용이야. 그런 내용을 학생들 보는 조선어 교과서에다가 쓴거야.
왜 썼을까? 왜 없는 얘기를 지어내서 학생들 보는 교과서에다가 쓴걸까? 답은 바로 나왔지. 책에서 일본인들은 대동여지도를 러일전쟁에서도 쓰고 총독부 토지조사사업에서도 썼다고 얘기했잖아. 조선인들은 이 귀한 지도를 몰라보고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우리 일본인들은 아니다. 우리는 귀한 것이 있으면 그 가치를 알아볼줄 아는 눈을 가졌다. 그럼 너희 조선인들은 무지한 권력자 아래에서 통치를 받아야 할까? 아니면 우리같이 똑똑한 사람들의 지도와 가르침 속에서 통치 받아야 할까?
하는 내용인거지.
흔히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 할 때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붙어. 인물을 통해 현재를 비교하고 그 인물을 통해 현재를 비판하거나 또는 찬양하는거지. 그리고 역사적 인물의 재조명에 있어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이 개입되는 순간 재조명은 단순한 재조명이 아닌 날조와 선동이 되는거야. 안타깝게도 광해와 불꽃처럼 나비처럼 두 영화는 단순한 재조명의 틀에서 벗어났어. 그리고 김정호 역시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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