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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story

문화대혁명

가지 측면〕 문화대혁명은 일관하여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적인 성질과 당내투쟁의 대중운동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 3가지가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 제1단계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린뱌오〔林彪〕를 당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권을 강행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인민해방군의 주도에 의하지 않는 한,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이른바 실권파 세력으로부터의 탈권(奪權)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나타냈으며, 여기에 병영(兵營) 체제화한 중국 권력중추의 정치위기의 내부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71년 9월 일어난 충격적 린뱌오이변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문예정풍(文藝整風)>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종래의 문화나 가치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 발전단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어떻게 계승하여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 점에서 중국은 자기 문명사를 철저하게 고쳐 쓰려는 듯했으나 <마오쩌둥사상>의 절대화는 사상이나 문화를 본래적인 생명에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의 기능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빈곤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중국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마오쩌둥의 의식에는 도시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새로운 계층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한편 절대적인 마오쩌둥 가부장체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단계에 중국 민중의 저항을 받고 중국전통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쳐 마오쩌둥의 이상은 마침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75년 여름의 항저우사건〔杭州事件〕, 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 정치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었고, 같은해 10월 베이징정변〔北京政變〕으로 마오쩌둥 측근인 <사인방(四人幇)>은 실각되고 말았다.



〔전개과정〕 마오쩌둥은 장칭〔江靑〕·장춘차오〔張春橋〕 등 이른바 <장칭문예살롱> 인사들이 모였던 상하이에서 문학대혁명의 개막을 알리고, 65년 11월 10일 젊은 문예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당시 상하이시당위원회 서기〕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학자로서 이름난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시작했다. 우한 비판은 베이징의 지도적 지식인들, 이른바 <삼가촌(三家村)그룹>에 대한 비판 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윽고 당베이징시당위원회가 실권파 아성이라고 격렬히 비판되었고, 펑전〔彭眞〕·베이징시장(당베이징시 위원회 제1서기) 등이 일제히 규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66년 4월 상순, 베이징시 당위원회가 개편되었고, 4월 18일자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 사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처음 공식규명했다. 이어서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신호나팔 구실을 했던 당 중앙 <통지>를 공포하고, 당 중앙 문혁소조(조장 陳伯達, 제1부조장 장칭)를 설치했다. 이윽고 5월 25일 베이징대학의 젊은 여성교사 녜위안츠가 교장 루핑〔陵平〕 등을 <삼가촌그룹>의 일파라고 격렬히 비난한 대자보를 붙였다. 6월 1일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전국에 방송토록 지시하고, 이를 <20세기 60년대 중국의 파리고뮌 선언서>라고 찬양했다. 6월 3일 펑전 등의 해임과 베이징시당위원회의 개편을 발표하고, 실권파 아성의 붕괴를 알림과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을 견지해 온 린뱌오의 공적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마오쩌둥은 회기중이었던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자―나의 대자보>를 스스로 붙였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제1회 100만명집회에 모였던 홍위병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가두진출하여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면서 격렬한 구문화(舊文化) 파괴행동을 벌였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 중심의 가두투쟁단계에서 실권파 타도를 위한 탈권투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실권파의 저항도 끈질겨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 사이의 무력투쟁이 계속되었을 때, 린뱌오휘하의 인민해방군은 67년 1월 23일 탈권투쟁에 대한 군(軍)의 전면개입을 결정했다. <1월혁명>이라는 상하이의 탈권투쟁에서 상하이의 반란파는 코뮌형 권력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나, 마오쩌둥 등 당 중앙은 이 코뮌구상을 갑자기 눌러버렸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 뒤 마오쩌둥·린뱌오주류파는 혁명파의 <대연합>에 의한 탈권을 호소하며 혁명간부, 군(軍) 대표, 혁명적 대중대표로 이루어진 <삼결합(三結合)>의 혁명위원회를 수립하라고 호소했고, 혁명위원회는 68년 9월까지 전국의 모든 1급 행정구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약칭 9전대회)가 69년 4월에, 56년의 8전대회 이래 13년만에 열렸다. 이 9전대회는 문화대혁명이 위로부터의 당재건이라는 큰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오쩌둥의 비길 데 없는 권위를 확립하고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의식이었다. 그 동안 마오쩌둥 측근으로 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는 70년 8~9월 제 9 기 2중전회에서 <대야심가·음모가>라 하여 실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린뱌오이변이었다. 린뱌오이변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73년 7월 중국당국은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몽골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의 한 중대한 결말이 된 린뱌오이변이라는 심각한 사건 후인 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가 열렸다. 10전대회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정치보고, 왕훙원〔王洪文〕의 당규약개정 보고를 채택한 뒤에 새로운 중앙 지도부를 선출했다. 중앙위원회 주석에 마오쩌둥을, 부주석에 9전대회 때 부주석이 린뱌오 단 한 사람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왕훙원·캉성〔康生〕·예젠잉〔葉劍英〕·리더성〔李德生〕 등 5명을 선출했다. 이 10전대회는 린뱌오 처단과 대(對)소련 비난을 거당적으로 실시한 의식을 나타냈으나, <마오쩌둥체제하의 비(非)마오쩌둥화>와 탈문화대혁명을 지향하는 <조류(潮流)>의 크기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10전대회 전후에 일어난 공자비판(孔子批判)·시황제예찬(始皇帝禮讚) 운동은 이윽고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되어 이른바 <반조류>의 반격이 일어나 마오쩌둥체제 말기의 내부각축은 차츰 치열해갔다. 75년 여름에 일어난 항저우사건은 공장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동맹파업이 몰고 온 항저우 일대의 혼란을 군대가 제압한 사건이었고, <빈곤의 유토피아>를 강제해왔던 마오쩌둥체제의 말기적인 사회적 모순을 안으로부터 노정시킨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조류>와 <반조류>가 내부적으로 각축하는 가운데, 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총리는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읽었던 덩샤오핑부총리는 감히 <4개의 현대화>노선 계승을 문혁파 지도자의 면전에서 서약하여 문혁파들을 크게 초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주자파(走資派)> 비판운동이 76년 2월 초순부터 일제히 전개되었다. 2월 초순에는 문혁파 비(非)상하이그룹의 화궈펑〔華國鋒〕이 국무원총리대행으로 마오쩌둥의 지명을 받아 일약 부각되었으나, 이러한 <역류>에 대한 대중적 항의로 일어난 것이 천안문사건이었다. 당 중앙은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단죄하고 덩샤오핑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켰으나, 후에 천안문사건이 재평가되었을 때에는 <위대한 4·5운동>으로 찬양되었듯이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체제하의 대중반란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중국의 권력중추는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후계권력 싸움이 마오쩌둥 측근체제 내부에서 격화되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결정적인 계기로 하여 10월 7일에는 <기정방침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마오쩌둥의 유훈(遺訓)을 내걸고, 권력계승권을 재빨리 주장했던 문혁파 상하이 그룹인 <사인방>이 모두 실각하는 충격적인 베이징정변과 함께 화궈펑체제가 일거에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화궈펑은 마오쩌둥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당신이 한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또 하나의 마오쩌둥 유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그림자>는 이윽고 중국내정 전체의 마오쩌둥화가 진전됨에 따라 화궈펑의 정치적 장래를 흐리게 하여 77년 7월에는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재부활되었다. 같은 해 8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전대회에서는 새로운 당규약 가운데 <4개의 현대화>가 명기(明記)되었고, 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통일적인 국가목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오늘날의 <4개의 현대화>라는 노선(路線)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오늘날의 평가〕중국은 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회복시키는 한편, 문혁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1) <해서파관> 비판

모택동과 실권파 간의 대립 : 앞에서도 누차 설명한 바 있지만 문혁의 배경에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계급투쟁론과 권력에 대한 탈권투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엄청난 재앙만 가져다 준 것 같다.



중국은 1953년에 시작한 제1차 5개년경제계획에서 농촌지역은 오히려 희생을 강요 받았고 또 소련과의 불화로 인하여 경제건설에 문제점을 낳았다. 1958년이 되어 모택동은 다시 한번 자력갱생의 대약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잘살아 보자고 시작한 대약진운동이 3년간에 걸쳐서 오히려 대실패를 가져와 인민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었다.


결국 경제건설에는 이를 조정해야 하는 조정국면을 갖게 되고 이에 모택동은 그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의 자리를 유소기에게 넘겨주고 제2선으로 물러났다. 권좌를 물려 주어야 하고 정책방향도 조정국면이라는 수정주의 쪽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와 유소기,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실권파가 형성되어 정치상에 이중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였을 때 당중앙회의에서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팽덕회는 그침없이 모택동에게 비판을 가하였다. 모택동에게 그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팽덕회는 오히려 모택동 수구세력에게 밀려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실권파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과감하게 모택동에게 도전하면서 모택동을 공격하고 비판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신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넘겨진 권력을 되찾기 위하여 또다시 새로운 정풍운동을 일으켜야 했을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붓고 있을 당시, 유소기와 등소평과 같은 조정국면의 정책을 지지하던 실권파 지식인들도 나름대로 문예활동을 하면서 유소기를 지지하고 모택동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문예비판 : 당시 북경시의 부시장이면서 역사학자이었던 오함은 경극의 희극본인 <해서파관>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썼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명대 말기의 황제인 가정제가 포악하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호부주사였던 해서가 정치와 인민의 고통을 고려하여 가정제에게 직접 정사를 잘 살펴달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의 글속에는 지주들이 수탈한 토지는 반드시 일반백성에게로 돌려 주어야 하며 군주의 전제주의적 독재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정황제는 노하여 해서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킬 것을 준비하였으나 황제가 갑자기 죽게 되자 화를 면하고 다음황제는 융경황제가 등극하여 민심에 따라 해서를 사면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희곡의 내용에는 역사가 말해주는 어떤 암시가 들어있다. 아마도 역사학자인 오함도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보고 자기의 뜻을 표시한 것이라고도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61년에 발표한 오함의 <해서파관>은 명대의 청렴한 관리 해서가 관료들의 모함을 받고 면직되었다는 사실을 빗대어, 이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 강한 반발을 보인 당시의 국방장관 팽덕회를 숙청시킨 일을 해서의 경우를 빌어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주의 토지수탈이나 황제의 독재성에 대해서는 당시 모택동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성과 토지의 인민공사화로의 집단농장화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 빗대어 은근히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더 이상 북경에서는 사회주의 계급투쟁과 수정주의 타도, 그리고 자기의 탈권운동을 진행시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상해로 빠져 나갔다. 드디어 1965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모택동의 열성적인 추종자인 상해의 극좌파 작가인 오문원이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의 비호를 받아 1961년에 발표되었던 오함의 희곡 <해서파관>을 포적으로 삼아 1965년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은 문예비평에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약 10여년 동안 혼란을 가져올 문화대혁명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1965년 요문원의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은 상해의 문회보 신문에 실어 오함과 그 내용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인민공사를 비방하며 지주를 옹호하고 무산계급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모택동의 무산계급 혁명노선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2) 문화대혁명의 시작

문예비판의 확대 : 오함은 당시 북경 부시장이었고 북경시 당위원회와 중앙당 선전부 위원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탁과 요말사와 함께 삼가촌(三家村)이라 불리면서 언론계에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북경시장인 팽진과 육정일 등과 연결되어 당최고 지도자인 유소기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결국 모택동에 의한 문예비평의 음모는 결국 정치적 비판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권파 측에서는 요문원의 오함에 대한 비판 논문이 실리자 발빠르게 오함으로 하여금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여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 불똥을 다시 경극 작품들을 비판하고 경극정책에까지 비판을 가하는 등 문에비평을 확대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오함에 이어 전한에 까지 비판이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실권파 당중앙정부는 1966년 2월에 들면서 ‘문화혁명5인소조’라는 조직을 만들고 여기에서 ‘2월제강’을 작성하여 문예비평활동을 무마시키려 하였다. 비록 ‘2월제강’에서 표현한 내용들이 문예비평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잘 수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미 가열된 문예정풍운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해 3월이 되자 또다시 북경대학 역사교수 전백찬, 중국과학원 원장 곽말약까지 비판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모택동 부인 강청은 상해에서 국방부장관 임표와 결탁을 하여 상해에서 군부대문예좌담회를 열어 반사회주의 문예활동은 청산시켜야 한다고 선언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과 그 무리들은 실권파의 ‘2월제강’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모택동의 깃발앞에서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쳤다.


이에 앞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임표는 모택동의 지지를 받아 군내부에 임표의 반대파이며 문혁5인소조의 위원이었던 총참모총장 나사경을 군권을 휘둘러 반당활동을 하고있다는 죄목을 걸어 체포하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모택동은 임표계열의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소기, 등소평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권력투쟁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5.16 통지 : 1966년 5월 16일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는데 그기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라고 하는 이른바 <5.16통지>가 채택되었다. 이 통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결정되었다. 첫째, ‘2월제강’의 내용과 ‘문화혁명5인소조’를 폐지하고 새로이 ‘문화혁명소조’를 결성한다. 둘째,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계속 진행한다. 셋째, 그에 따라 공산당, 정치권, 군사, 그리고 문예계 전반을 통하여 반사회주의 자산계급의 인물들을 색출하여 맹렬히 비판할 것을 결정하였다. 말하자면 문화대혁명의 권력투쟁을 시작하겠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5.16통지문에서 나타난 결정적인 내용은 ‘2월제강’에서 보인 문화혁명은 단순히 학술영역에서만 투쟁을 하자고 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 통지문은 북경시위원회와 당실권파에게 결정적인 공격을 주기위해서는 문예비평운동의 수준에서 정치투쟁의 수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5.16통지문은 곧 전국으로 폭풍처럼 번져 나갔다. 모택동은 반혁명 수정분자가 정권을 탈취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브르조아 독재로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파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동하면서 대중운동으로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문화대혁명의 권력투쟁바람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북경대학의 대자보 : 북경대학 철학과 강사이며 모택동의 추종자였던 섭원재는 이미 학교의 공산당위원회를 공격한 바가 있어 엄중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팽진 북경시장이나 학교의 당위원회에 대하여 강한 불만이 있었다. 그는 ‘5.16통지문’의 소식을 듣고 드디어 학생 7명과 함께 학교의 당위원회를 공격하는 대자보(大字報)를 섰다.


특히 북경대학의 총장은 ‘5.16통지문’이 채택된지도 모르고 또 학생의 불법행위를 금지시키고 있었다. 반감을 품은 학생들은 ‘대학은 과연 문화대혁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대자보에서 말하기를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쳐들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을 단호하게 처단하자고 선동하였다. 북경대학의 섭원재의 대자보가 발표된 이후 전국의 각 대학에서는 서로 앞을 다투어 학교의 당위원회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하였다.


5.16통지문이 발표되면서 그 내용은 대학교로 전파되었고 그것은 곧 바로 대자보의 형태로 대학생들을 선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몇일 사이에 확대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것은 당내의 투쟁적인 문제가 전 사회로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5.16통지문에 이어 드디어 5월 29일에는 북경 청화대학 부속중학에서는 홍위병이 탄생하였다.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은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을 위한 전위적인 대중조직으로 그 전의 문예정풍운동을 정치적인 계급투쟁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홍위병 운동의 격발 : 한편 팽진의 해임과 북경의 당위원회의 개조가 보고되면서 실권파의 붕괴가 예고되었다. 동시에 모택동 사상을 견지해 왔던 임표에 대한 공적은 크게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실권파에 대한 모택동과 임표의 공세가 계속되는 속에 유소기와 등소평들도 공작조를 조직하여 정항과 방위를 시도하였다. 그러는 사이 당내의 권력투쟁은 더욱 대중운동으로 격화되어 갔다. 모택동이 홍위병의 설립을 지지하는 담화문이 발표되자 각 대학의 홍위병의 활동은 대학내의 당위원회와 권위있는 교사들에 대한 공공연한 조반(造反)이 확대되어 갔다.


6월달이 되자 전국의 각 대학에서는 홍위병이 보편적으로 조직되어 갔다. 8월이 되어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홍위병들의 시위가 출현하게 되어 세계를 경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미 홍위병이 조직화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배후에는 모택동이 있었다. 모택동은 홍위병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즉 저항하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슬로건을 고무하고 새로운 것을 위하여 과거를 파괴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는 홍위병들을 찬양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6년 8월 그 때 중국공산당 8기 11중전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모택동은 노골적으로 ‘사령부를 포격하라’고 하는 대자보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신단계라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走資派)를 몰아내는 것이 당면의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계급투쟁을 하라고 선동하였다.


8월 이후 중국은 전국적으로 열광적인 홍위병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무쟁투쟁도 나타나고 있었다. 모택동은 홍위병의 과격한 행동에 대하여 자제해 줄 것을 호소해야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당은 실권파의 최고지도자 타도에게만 투쟁의 초점을 좁히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탈권투쟁 : 1966년 년말이 되면서 홍위병들의 운동은 질적인 전환을 하면서 유소기, 등소평 등의 당정치 지도자들을 지명하면서 비판과 공격을 시작하는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소재는 명확해 졌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중심의 가두투쟁에서 실권파타도라는 탈권투쟁으로 질적인 전환을 하고 있었다.


실권파의 저항도 완강하여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의 무장투쟁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에 임표는 임표의 통솔하에 있는 인민해방군을 모택동의 요청에 따라 탈권투쟁에 대한 군대의 전면적인 개입을 선언하였다.


탈권투쟁의 과정에서 본격적이고 계통적으로 유소기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유소기는 1968년 10월 중국공산당 8기 12중전회에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당으로부터 제명되어 중국의 정치적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문혁의 수습과 임표 : 1968년에서부터 전국 각지에서 혁명위원회가 하나하나 새로 발족하기 시작하였다. 문화대혁명은 각 지역의 혁명위원회를 통하여 서서히 수습되어 가는 기미를 보였다. 문화대혁명이 수습단계에 들면서 당중앙은 당재건을 수립하는데는 반드시 모택동 사상에 근거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1969년 4월 제9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문화대혁명을 통한 당의 재건은 우로부터 장악한다고 전제하고 모택동의 막강한 권력의 장악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모택동의 권력장악에 따라 모택동은 임표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고 사회주의 전진을 위하여 모택동의 친밀한 동지 임표를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규정하였다. 문화대혁명에서 보인 군의 공헌과 협력으로 정치적 위기를 벗어난 모택동은 그 대가로서 임표에게 권력이양을 약속했던 것이다.


좌파의 퇴조와 주은래 : 임표는 이 제9차 전국인민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하였는데 그 내용중에 대외관계문제에 있어서 그는 사회제국주의(소련을 겨냥)와 대결할 것을 강조하면서 침략전쟁에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임표와 같은 중소분쟁을 야기시키는 그리고 대소강경노선은 중국의 국가적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1969년 여름에는 신강지구에서 중소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때 주은래는 중국의 내정과 외정에 관여하면서 중소의 화해 또는 문혁으로의 조용한 탈피를 추진하여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임표사건과 중미의 접근 : 우리는 여기서 중국내에 그 동안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원만한 수습작업이 진행될 것을 희망하는 집단과 문혁의 성과를 자기의 권력장악으로 파악하는 정치집단 간에 간격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권력장악에 따른 강경노선의 주장과 문혁을 탈피하여 조정국면을 유지하려는 온건파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듯하였다. 다시 말하면 군대의 대두와 당관료, 행정관료의 사이에 정치안정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암투가 있었던 듯 하였다.


그것은 임표사건으로 끝이 났다. 모택동의 후계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임표가 1972년 7월 죽었다는 것이다. 임표사건은 아직도 많은 의문이 있다. 중국당국은 임표가 모택동 주석을 암살하려다 실패로 인하여 몽고로 도주하다가 비행기 사고에 의하여 추락사하였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문혁의 조정국면 앞에서 주은래등의 실무파 관료들의 반대, 구실권파 세력들의 반대, 그리고 임표의 대두를 싫어하는 군부세력들 등의 연합세력 앞에 결과적으로 독재적 강경노선은 괴멸된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주은래는 군의 대두를 억제하고 동시에 강대국과의 충돌을 피하는 의미에서 1969년 7월에 미국이 중국에 대하여 접근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1971년 7월 닉슨 미국대통령의 방중계획에 대한 발표는 이른바 ‘닉슨 쇼크’로서 당시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중국으로 보아서는 문혁에 대한 조정국면으로서 군의 등장을 억제시킨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임표사건은 문혁의 심각한 모순을 나타낸 것으로서 중국의 권력투쟁으로서의 문화대혁명은 참으로 허망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