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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story

난징대학살 [南京大虐殺(남경대학살)]

난징대학살 [南京大虐殺(남경대학살)]


1937 12월∼1938 1월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일본의 중지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일반시민 대학살 사건이다.

난징사건이라고도 한다.

일본군이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했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 5337(그 중 어린이가 859, 부녀자가 2,127)였고, 그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시내의 약 1/3이 소실됨)도 횡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에도, 또한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제2 세계대전 뒤의 극동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마쓰이가 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또 당시의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長谷壽夫]를 포함한 여러 명이 난징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서 사형되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또한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경쟁 가담자는 1948 중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도시아키노다 다케시였다. 심지어는 중국인 포로를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중국 정부와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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