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story

중국 전족(三寸金蓮)풍습 사진

1. 전족이란?


전족은 중국 고대의 악습중 하나이다.


여자의 양발을 천으로 졸라매어 인위적으로 작고 뾰족하게 변형시켜 소위 말하는 삼촌금련(三寸金蓮)의 발을 만드는 것이다. 삼촌금련(三寸金蓮)이란 인위적으로 작게 만든 고대 여인의 발을 지칭하는 말로 고대 여성의 미를 기준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전족의 모양이 연꽃과 비슷하고 또한 중국에서 "귀"함을 표현할때 "金"자를 붙이기 좋아하는 습속에 의해 중국 고대 여성의 전족은 "금련(金蓮)"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



 

2. 전족의 기원



기원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남당(南唐)의 후주(后主) 이욱(李煜)이 무희가 금제 연꽃반 위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연꽃반이 너무 작아서 무녀들이 하얀천으로 감싼 발을 곧추세운 후 그 위에서 춤을 추었던 것이 훗날 점차 상류사회에 유행하고 민간의 여자들이 서서히 이를 따라하여 관습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 한다.




전족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전족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다르다. 하우 시대로 보는 설, 상이나 춘추전국시대로 보는 학설 또는 진시대로 보는 사람 등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러나 태평흥국 8년 때의 돈황 벽화를 보면 귀족 부인들의 발이 전족이 아닌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전족은 아마도 11세기쯤 생겨서 송 휘종 선화 년간에 많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북송시대에는 전족이 아직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고, 남송에 이르러 상당히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경의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남송 시대의 수산도와 잡극인물도에 묘사된 영인들의 발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아 이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푸지엔성의 추저우에서 출토한 남송 시대의 묘에서 6켤레의 전족이 나왔다. 이것들은 길이가 13.3~14센티미터, 넓이가 4.5~5센티미터다. 그러나 남송 때도 일반 여자에게까지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나라때 전족은 주로 상류 구부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북송 때 기녀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남송에 와서 상츄층 부인들의 전족을 보고 기녀들도 이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송 시대의 전족은 명, 청 때보다 길어, 13.4센티미터에서 17센티미터나 되었다.


원 나라의 시조인 몽고인도 한족 여자의 전족을 싫어하지 않아, 남송에 비해 오히려 더 널리 보급되었다. 원 나라 말기에는 여자가 전족을 하지 않으면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가 되었다. 왕실보의 <서상기>나 관한경의 <규사>같은 유명한 문학작품에도 여자의 작은 발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평민 여자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고, 귀족 부인들도 모두 한 것은 아니다.

전족이 전성기를 맞은 것은 명나라때에 이르러서다. 시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기 전에, 전족이 이미 상류 사회 여자들의 신분과 계급을 상징할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주원장이 짱스청과 대적할 무렵, 전족을 금지시킬 정도로 유행했다고 한다. 명 시대에는 전족이 더욱 작아졌다. 게다가 모양도 요사스럽게 변해서 도저히 사람의 발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산시성과 지금의 허베이성 서북부의 시앤더푸가 전국 최고의 전족 명산지였다. 이 때문에 명 무종이 항상 이 지방으로 가서 최고의 전족 미녀들을 골라오곤 했다고 한다.



 

명 왕조때 황궁의 여자들은 반드시 전족을 해야 했다. 이것이 또한 귀족 부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들은 전족을 만드는 방법이 일반 여자들과 달랐다. 숭정황제가 특히 여자의 작은 발을 좋아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주 황후의 발은 큰 편이었다. 티엔꾸이페이의 발은 3촌밖에 안 될 만큼 작았고, 또 다른 위앤꾸이페이의 발은 티앤꾸이페이보다 컸다. 하루는 황제가 주 황후 앞에서 티애꾸이페이의 발은 작아서 귀엽고, 위앤꾸이페이는 발이 커서 밉다고 말했다. 주 황후는 황제가 자기 발이 미운 것을 돌려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 넘겨 짚고 몹시 기분 나빠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렇게 여자들은 남자에게 작은 발을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만주족은 청 왕조를 세운 뒤 처음에는 한족의 전족을 금지했다. 강희 3년 칙령을 내려, 이후 새로 태어나는 여자 아이는 전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부모나 가장을 처벌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전족에 병적으로 집착하여, 강제로 금지시키기가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자들의 변발은 자르지 못하게 할지언정, 여자들의 전족은 금지하지 못한다.'라며 광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강희 7년에 할 수 없이 전족 금지령을 취소했다. 그렇지만 한족 이외의 다른 민족들은 여전히 전족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광황제 18년에 다시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금지령이 내려진 후에도 많은 여자들이 전족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계속 발은 동여매는 고통을 자진해서 감수했다.


 

3. 전족의 단계


얼굴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지만 전족은 온전히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족은 여성의 인내, 정숙, 가정교육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담하게 '잘 만든' 전족은 여성의 순종, 엄한 가정교육을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전족을 시작하는 나이는 보통 생후 4,5세부터이다. 이 때부터 발을 묶기 시작하여 3,4년 정도에 걸쳐 발을 압박해 나가면 7,8세쯤 되어 대략적인 발의 모양이 나온다. 그리고 발가락 사이에는 명반같은 약재를 넣어 염증을 막는다. 이렇게 하여 시간이 지나게 되면 뼈의 기형이 일어나고 발이 안으로 접혀지게 되는데 그 모양은 발가락이 바닥에 붙어 그 사이에는 공간이 생기고 발등은 위로 돌충이 되어 전체적인 발길이가 짧아지게 되는 것이다.
 



(1) 1단계
아이가 3살 전후가 되면 닭을 잡아 뜨거운 뱃속으로 아이의 발을 집어넣어 부드럽게 만든다. 그 다음 엄지발가락만 제외하고 네 발가락을 완전히 꺽어 발바닥에 밀착시킨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예쁜 발 모양을 만들기 위해 자주 걷게 한다. 발가락 사이에 피부를 쉽게 수축시키고 염증을 방지하기 위한 약을 바르고 30~40m의 길고 흰 천으로 발을 사정없이 힘껏 동여서 바느질로 꿰맨다. 이때 어떤 어머니들은 구부려진 발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고 발가락이 납작해지도록 누르기도 했다. 아이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면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의 입에 헝겊을 쑤셔 넣곤 했다. 그런 후 끝이 뾰족한 작은 신발을 신겼다.


(2) 2단계
평균 사나흘에 한번씩 발을 풀어 씻긴 다음 다시 동여매는데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 세게 조인다. 발가락과 발바닥이 밀착되다보니 자연히 티눈이 생기게 되고 이것을 바늘로 빼낼 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날이면 여아들은 고통으로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어머니들은 가슴이 아파 눈물만 줄줄 흘린다.


(3) 3단계
6개월쯤 지난 후 발을 더욱 수축시키는 단계를 6개월 정도 지속하는데 피부가 벗겨지고 고름이 생기
며 심할 경우 발가락이 썩을 수도 있다. 


(4) 4단계
발등을 더욱 동그랗게 오그리고 엄지발가락과 네 발가락을 함께 발바닥의 오목한 쪽으로 구부려 넣는다. 이렇게 해서 10cm 정도의 길이가 되면 가장 훌륭하고 예쁜 전족이 된다는 얘기다.

 

4. 전족을 했던 이유는?



그럼 이런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며 생활에 있어 엄청난 불편을 주었던 전족을 중국의 여인들은 왜 천여년에 걸쳐서 유지 하였던 것일까?




첫째, 심미관이다.
 
삼촌금련(三寸金蓮)의 출현을 초래한 심미관의 기초는 음양(陰陽)학설에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중국의 전통사상 가운데 음양이론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음양론에 의하면 남성은 양이고 여성은 음이요, 단단함은 양이고 부드러움은 음이며, 큼은 양이고 작음은 음이다. 또 곧음은 양이고 굽음은 음이며, 강함은 양이고 약함은 음이며, 움직임은 양이고 고요함은 음이다. 이러한 음양사상이 심미관에 반영되면 이른바 여성미란 앙증맞음, 연약함, 얌전함 내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갖추어야 한다는 등 '음성적 부드러움'의 측면으로만 체현된다. 심미관에 의한 작은 발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비정상적인 세태는 당시 사람들이 전족을 여성 미의 필수적인 요건이나 심지어는 제일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도록 몰고 갔다.





둘째, 예교관(禮敎觀)이다.


예교(禮敎)란 중국의 고대사회에서 신분제도와 종법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제정된 예의규범과 도덕표준이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예교는 '삼종'(三從 : 여성이 지켜야 하는 세 가지 도리. 즉 집에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과 '사덕'(四德 : 여성이 갖추어야 하는 네 가지 덕성. 즉 마음씨, 말씨, 맵씨, 솜씨를 가리킨다)을 강조하고,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된다.'는 것을 천명하여 일방적인 정조관념을 표방하였다. 심지어는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 :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7가지의 허물. 즉 시부모에게 불순함, 자식을 못 낳음, 음란함, 투기함, 고질병이 있음, 수다스러움, 도둑질을 함 등이다)을 남편이 부인을 버릴 수 있는 이유로 규정함으로써 여성은 반드시 시집가서는 무조건 지아비를 따라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러한 봉건적 예교와 중국 부녀의 전족 풍속은 밀접한 상관성을 띠고 있었다. 이에 관한 명확하고 두드러진 현상이 하나 있다. 즉 예교는 송대에 이학(理學)이 성립하면서 날로 삼엄해지고 명, 청대에 이학이 대대적으로 성행하자 최고조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족 풍속의 출현의 발전과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예교는 남녀사이에는 분별이 있고, 여성의 전족은 남성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이며, 여성을 구속하기 위함이고, 여성이 정조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표방하기도 한다.




셋째, 기형적 성욕의 발현이다.


오래전부터 봉건문인문사들은 여성을 하나의 놀이감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런 문인들이 비뚤어진 심미관으로 여성의 작은 발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으면서 그것이 사회 전반의 미적기준으로 확산이 된것이다. 기형적인 전족을 두고 삼촌금련(三寸金蓮)이라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대며 수많은 미사어구를 달아 댄것도 바로 이들이다. 게다가 여인들의 작은 발을 두고 나름의 품평을 해대며 매우 체계적으로 그 미의 기준치를 형성시킨것도 이들인 것이다. 전족은 여성에 대한 억압심리인 새디즘(sadism)의 발로라는 주장이다. 여성 쪽으로 보면 자학심리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풍속이 된 뒤에는 그 벽을 깰 수 없는 굴레가 된 것이다. 또한 중국 남성들은 작은 중국 여성들의 썩어 들어가는 발의 냄새들과 비명을 병적으로 좋아했으며, 이러한 남성들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억압받던 여성들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의 세가지 외에도 얘기되어 지는 전족의 이유는, 남자들이 잘 사는 경우 몇명씩이나 첩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 못사는 경우 남자 몇명이 돈을 모아 공동의 처를 겨우 사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성의 수가 모자라므로 달아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발을 못쓰게 했다는 얘기가 그 하나다.

또 다른 얘기는 발이 작고, 운동은 부족하므로 둔부(엉덩이)가 커질 뿐 아니라 걸을 때 엉덩이를 뒤뚱뒤뚱하며 걷는 모습이 더없이 섹스어필하게 보였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다.


 

 5. 현대판 전족, 하이힐


현대에도 전족이 있다? 그렇다! 바로 하이힐이다.
 
하이힐의 유래는 꽤 흥미롭다. 독일의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의 역저<풍속의 역사>에 의하면 하이힐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처음 생겼다. 바야흐로 화장실이 따로 없던 시절, 집집마다 밤새 용기에 받은 오물을 밖으로 내던지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던 때였다. 운이 지독히 나쁜 사람은 졸지에 오물덩어리를 뒤집어썼고,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 하이힐이 고안되었다.




어찌 됐건 하이힐을 신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여성은 한 명도 없다. 이 매혹적인 구두는 여성들에게 발가락 기형, 무릎 관절염, 요통등의 나쁜 손님들을 내준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하이힐을 즐겨 신는다. 그것은 종아리를 가늘게 하고 허리와 가슴 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성들은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파도 결코 하이힐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이힐은 여성들에게 유혹의 도구이자, 미를 위한 절대적인 기호이다. 보이지 않는 관절 따위에 이상이 생기는 게 뭔 대수란 말인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몸매만 아름답게 비쳐지면 그만인데!  여성해방운동의 역사는 이제 꽤 깊다. 그러나 하이힐이 갖는 성적 도구화의 폐단에 대해서 공론화하는 작업은 아직까지 미미한 것 같다. 하이힐을 신는 것이 남성의 성적 쾌락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전족과 무엇이 다를까... 지금도 수많은 여성들이 전철 안에서 하이힐을 신고 있다.



세계의 의학자들은 하이힐이 현대판 전족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발의 볼 부분에 모든 압력이 실려 모든 체중을 그 곳에서 지탱해야 하며 그로 인해 몸이 비틀거리고 허리에 무리하게 힘이 들어가며 이를 막기 위해 장딴지 근육이 빨리 피로해지고 심지어 통증까지 느끼게 된다고. 게다가 뇌수에 자극을 주어 임신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하이힐을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이힐 때문에 장애가 생긴 발을 X-ray로 살펴보면 중국 여성들의 전족한 발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현대판 전족'인 셈이다. 발가락의 기형과 발뒤꿈치 통증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무릎이나 허리 통증을 유발하고, 발목 염좌 및 종아리 근육의 단축을 초래한다.

발은 인체에서 가장 힘든 노동을 하는 기관 중 하나이다. 1Km를 걸을 때마다 약 16t의 무게를 지탱해야만 한다. 그런데 쉽게 생각하듯이 발이 그렇게 단순하고 억세기만한 구조가 아니다. 발에는 약 26개의 뼈와 수많은 관절과 인대가 복잡하게 얽혀져 조화를 이룬 아주 섬세한 기관인 것이다. 그러한 수많은 구조들 중 하나에만 이상이 생겨도 발병이 나고 당장 걷기가 불편해진다. 또 발과 하지는 걸을때 피를 심장 쪽으로 올려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제2의 심장이라고도 한다. 이같이 중요한 발을 더 이상 더럽고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무엇을 위하여 아픈 것을 감수하고 하이힐에다 구겨 넣어야 할 대상이 되겠는가.



전 세계 여성들의 80%는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많은 수의 여성들이 다이어트를 한다. 대체 누구를 위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하이힐은 여성의 발을 고생시키고, 미니스커트는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며 다이어트는 여성의 몸을 학대하고 있다.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고안된 많은 것들은 여성의 미를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반면 여성의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미의 확장으로 이어질 것인지 억압의 도구가 될 것인지는 여성 스스로가 먼저 자신 만의 미(美)를 찾아내어 자유로움 속에서 그것을 확장시키는 노력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