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북경에서 5·4운동이 폭발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구민주주의혁명에서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이전되는 위대한 대결절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국이 패배를 선포함으로써 끝났다. 영국과 미국·프랑스·일본 등 전승국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베르사유 강화회의를 개최하였고, 중국은 전승국의 자격으로 회의에 출석하였다. 중국정부의 대표는 제국주의의 중국에서의 특권을 폐지하고, 중·일 간의 ≪21개조≫를 취소하며, 독일이 산동에서 취한 권익을 회수하는 등의 요구를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중국의 국가영토주권을 옹호하려는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독일이 전쟁 이전 산동에서 가지고 있었던 각종 특권을 일본이 접수하게끔 결정하였다. 중국은 침략당한 권익을 회수하지도 못한 전승국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도리어 패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어 분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나누어 먹기 식의 회의가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제정된 이른바 ≪화평조약≫을 매국적인 북양군벌정부는 승인하고자 서명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각계는 놀랐고 군중의 감정은 격앙되어 중국 인민 내부의 애국적인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5월 4일, 북경의 13개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에서 시위집회를 개최하여 제국주의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중국 문제에 대한 결정에 항의하고, 중국 대표에게는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친일파 관료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 등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밖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국적을 징벌하자≫, ≪조약서명을 거절하라≫, ≪죽음을 걸고 청도를 되찾자≫ 등의 구호를 소리높여 외쳐댔다. 시위학생들은 장종상을 몹시 두들겨 팼으며 조여림의 주택 조가루에 불을 놓았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인과 경찰을 출동시켜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북경의 학생들은 이에 격분하여 동맹휴교를 함과 동시에 전국에 통전하였다. 천진·상해·장사·광주 등 전국각지의 학생들은 분분히 호응하여 동맹휴교를 전개하고 거리로 나갔다. 6월3일, 북경 학생들은 노천 강연을 전개하였다. 이 때 다시 북양군벌정부는 강연을 하는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전국 인민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6·3≫이후 중국 노동자계급이 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애국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6월 5일부터 상해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실행하고 학생들은 동맹휴교에 들어갔으며 상인들은 철시를 실시하였다. 10일, 상해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6, 7만 명을 헤아렸다. 운동의 중심은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되었으며, 운동의 주력은 학생에서 노동자로 이전되었다. 동시에 운동은 전국의 20여 성, 100여 도시로 확산되어 상당수의 노동자계급·쁘띠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가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북양군벌정부뿐 아니라 제국주의까지 매우 놀라게 하였다. 전국 인민 특히 노동자계급의 강대한 압력 아래, 북양군벌정부는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였으며 조여림, 장종상, 육종여 3인의 ≪사직≫을 비준하였다. 28일, 강화회의에 참가한 중국대표단은 전국 인민의 압력 아래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절하였다. 5·4애국운동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5·4운동 동안 중국공산당이 탄생되지는 않았으나 이대교, 진독수 등 일군의 초보적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사실상 이번 반제투쟁의 조직자였고 지휘자였다. 모택동·주은래·운대영 등은 각기 장사·천진·무한 등지에서 이번 반제애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지도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계급이 독립된 정치역량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5·4운동은 철저히 비타협적인 반제반봉건 혁명운동이 되었다. 5·4운동은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의 시작이며 중국공산당 성립을 위한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국이 패배를 선포함으로써 끝났다. 영국과 미국·프랑스·일본 등 전승국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베르사유 강화회의를 개최하였고, 중국은 전승국의 자격으로 회의에 출석하였다. 중국정부의 대표는 제국주의의 중국에서의 특권을 폐지하고, 중·일 간의 ≪21개조≫를 취소하며, 독일이 산동에서 취한 권익을 회수하는 등의 요구를 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중국의 국가영토주권을 옹호하려는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독일이 전쟁 이전 산동에서 가지고 있었던 각종 특권을 일본이 접수하게끔 결정하였다. 중국은 침략당한 권익을 회수하지도 못한 전승국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도리어 패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어 분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나누어 먹기 식의 회의가 되어버렸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제정된 이른바 ≪화평조약≫을 매국적인 북양군벌정부는 승인하고자 서명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각계는 놀랐고 군중의 감정은 격앙되어 중국 인민 내부의 애국적인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5월 4일, 북경의 13개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 3,000여 명이 천안문에서 시위집회를 개최하여 제국주의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중국 문제에 대한 결정에 항의하고, 중국 대표에게는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친일파 관료 조여림, 육종여, 장종상 등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밖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국적을 징벌하자≫, ≪조약서명을 거절하라≫, ≪죽음을 걸고 청도를 되찾자≫ 등의 구호를 소리높여 외쳐댔다. 시위학생들은 장종상을 몹시 두들겨 팼으며 조여림의 주택 조가루에 불을 놓았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인과 경찰을 출동시켜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북경의 학생들은 이에 격분하여 동맹휴교를 함과 동시에 전국에 통전하였다. 천진·상해·장사·광주 등 전국각지의 학생들은 분분히 호응하여 동맹휴교를 전개하고 거리로 나갔다. 6월3일, 북경 학생들은 노천 강연을 전개하였다. 이 때 다시 북양군벌정부는 강연을 하는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전국 인민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6·3≫이후 중국 노동자계급이 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애국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6월 5일부터 상해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실행하고 학생들은 동맹휴교에 들어갔으며 상인들은 철시를 실시하였다. 10일, 상해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6, 7만 명을 헤아렸다. 운동의 중심은 북경에서 상해로 이전되었으며, 운동의 주력은 학생에서 노동자로 이전되었다. 동시에 운동은 전국의 20여 성, 100여 도시로 확산되어 상당수의 노동자계급·쁘띠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가 참가하는 반제국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북양군벌정부뿐 아니라 제국주의까지 매우 놀라게 하였다. 전국 인민 특히 노동자계급의 강대한 압력 아래, 북양군벌정부는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였으며 조여림, 장종상, 육종여 3인의 ≪사직≫을 비준하였다. 28일, 강화회의에 참가한 중국대표단은 전국 인민의 압력 아래 ≪화약≫에 대한 서명을 거절하였다. 5·4애국운동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5·4운동 동안 중국공산당이 탄생되지는 않았으나 이대교, 진독수 등 일군의 초보적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사실상 이번 반제투쟁의 조직자였고 지휘자였다. 모택동·주은래·운대영 등은 각기 장사·천진·무한 등지에서 이번 반제애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지도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계급이 독립된 정치역량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5·4운동은 철저히 비타협적인 반제반봉건 혁명운동이 되었다. 5·4운동은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의 시작이며 중국공산당 성립을 위한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