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공장 : 양식병기의 구입 또는 열강의 기술도입에 의한 군사공장 설립 등은 양무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중심 내용이다. 1862년부터 시작하여 총, 총알, 대포, 포탄, 부수기계 생산공장을 설치하였다. 특히 1865년 상해에 설립된 강남제조총국은 외국의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건설된 것으로 양무운동시기에 있어서의 최대의 규모였다. 또 무기제조에 부수되는 사업으로는 조선공장, 광공업, 군사기술에 대한 외국서적 번역출판사업 등이 있었다.
공장설립의 내용으로 보면 첫째, 금능기기국이 있다. 1865년에 이홍장이 남경에 설치하였다. 영국인에 의하여 건설되었고, 무기 방면에서는 전국의 최고였다. 제품은 이홍장의 회군의 장비에 공급되었다. 둘째, 복주선정국이 있다. 1866년에 죄종당이 복주에 건설하였고 프랑스인이 지도하였다. 해안방비와 해운을 위한 선박을 건조하였다. 셋째, 천진기기국이 있다. 양무운동이 한인관료 수중에 장악되는 것에 대항하여 만주인 중심으로 건설된 공장이다. 그러나 1870년 이홍장이 직예총독이 되면서 이를 확대하고 정비하여 북양군대의 무기를 공급하였다.
양무기업 : 1880년대 들면서 군사사업에만 한정되었던 양무운동을 확대하여 상무진흥의 양무기업에도 투자하였다. 방적, 광산, 방직, 기선, 전신전보, 제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군사부분은 완전히 국영으로서 관판기업이지만 양무기업 속에서는 민간으로부터 자본투자를 구하는 관독상판기업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홍장이 1872년 상해에 설치한 ‘윤선초상국’과 ‘상해기기직포국’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실권은 어디까지나 이홍장 계열의 관료에 장악되어 개인의 축재수단이 되었다.
어쨓든 1870년대 이후부터 양무운동의 성격은 군사부분에서 상공업활동에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가 일어났던 이유는 군사부문의 유지를 위해서 또 양무파 각 집단의 사병적 군사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거금의 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군사공장의 운영은 사실상 비생산적이고 비영리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익을 낳을 수 있는 부분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보이는 또 하나의 현상은 민간주도의 상공업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당시 상황 속에서 성장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관독상판의 영향 하에서 순수 상인의 발생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자본계층에서의 민권운동이 보이게 되고 관독상판에 대한 비판도 나타나며 정치불만도 표시하였다. 이점은 당시 주로 상해의 지식계층을 중심으로 나타나며 사상적으로는 변법운동으로 가는 최초의 모습이 되었다.
운동의 파산 : 양무운동의 파산은 1885년 청불전쟁을 전후하여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미 선진적 지식인 중에서 양무운동을 넘어 변법론을 제기하는 인물이 나오고 있었다. 양무파 관료 중에 마건충 등은 유명한 예이다.
마건충은 민족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금제의 폐지를 주장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민간상업과 민간기업을 보호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왕도는 양무운동이 외형적으로는 처세가 강하나 실제로는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사실상 양무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파산을 선고하게 한 것은 청일전쟁이다. 양무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찾아보면 양무파의 자강에는 열강침략에 대항한다는 대외적 자강과 국내적으로 국내반란을 진압한다는 대내적 자강이 있다.
대내적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하나 대외적 자강은 사실상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전쟁에 패배함으로서 양무운동은 실패의 결과만 낳은 것이다. 이홍장의 정책으로서 양보와 타협과 후퇴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외교정책이 파탄을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실패의 원인 : 양무운동의 실패를 위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는 보면 양무운동의 목표가 실제로는 민중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데 있었다고 하겠다. 오히려 운동은 열강에 의존하고 있고, 기계, 자재, 기술 등도 대부분 열강에 의존하여 진행되고 있었다. 양무파 관료들이 정치내부에서 발언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양무기업에서도 특권의 혜택을 가지고 있어 민간기업의 발전이 억제되는 경제적 독점현상도 보이고 있었다.
양무이론이 애매하다는 점에서도 실패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중국사회의 가치기준은 중국의 학술과 전통에 두고 다만 실용으로서 서양을 수용하여 중국의 가치를 보강하는데 기여하면 된다는 중체서용의 사고이었다. 때문에 그 결과로서 군사적 측면에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즉 청조지배체제를 보강하는 수단으로서 서양을 보았다는 점이다
학당설립과 유학생 파견 : 최초의 서양식 학교는 1862년 북경에 설립된 경사동문관이었다. 외국어에 익숙한 인물을 배양하기 위한 것으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이에 따라 양무운동 추진을 위한 기술요원을 양성하기 위해서 학당이 각지에서 설치되었다. 외국어 및 군사기술의 습득을 위한 목적으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맞추어 구미 유학생의 파견이 시작되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으로 파견되었다. 문제는 해외유학 자체가 실용주의에서 나왔기 때문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도 양무학교 졸업생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학생의 인물 중에는 중국의 근대화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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